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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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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산도 대첩은 1592년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거둔 해전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군의 수륙병진 계획을 좌절시키고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학익진 전술을 사용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함대를 격파했으며, 이 승리로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승진하고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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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한산도 대첩 기록화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모습 (1592년)
시기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장소견내량, 한산도 동쪽 해안
결과조선의 승리
관련 전투임진왜란
교전 세력
교전 1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일본 수군
교전 2조선 수군
지휘관 및 지도자
일본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조선이순신
이억기
원균
권준
무의공 이순신
정운
어영담
김완
배흥립
황세득
한백록
우치적
기효근
신호
이운룡
이영남
이언량
송희립
나대용
이기남
황옥현
이회
병력 규모
일본 수군한산도 방면:
대형선 36척
중형선 24척
소형선 13척
안골포 방면:
42척
조선 수군전선 56척 (거북선 3척 포함)
수군 1만 명
노꾼 1만 명
피해 규모
일본 수군~100척 침몰
조선 수군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
기타 정보
주요 목표수군의 남해상 제해권 확보

2.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육지에서 연승을 거두며 빠르게 북상하였으나,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연패하였다.[1]

일본 수군은 가덕도거제도 부근에서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고,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1592년 음력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총 55척이 되었다.[8]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김천손에게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8]

한편, 같은 날 이순신 휘하의 수졸 황옥현이 도주했다가 붙잡혀 군무이탈 혐의로 처형되기도 했다.

2. 1. 조선 수군의 연승과 일본군의 위기

1592년 5월부터 이순신 함대는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등에서 연승을 거두며 일본 수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1]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보급로가 끊기고, 육군과의 협공 작전에도 차질이 생기면서 위기에 직면하였다.

2. 2. 일본군의 반격 준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자, 제해권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에게 수군 증강을 명령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견내량으로 진입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8]

한편,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동원 정수는 1,500명으로 알려져 있다.[9][10][11] 당시 석고(石高)가 3만 석 정도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5,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2. 3. 조선 수군의 출전과 연합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은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등에서 승리하였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거제도 부근에서 서진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음력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6일 이억기와 함께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총 55척이 되었다.[8]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에게서 일본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견내량은 좁은 해협으로, 함선 간의 충돌 위험이 있어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이에 이순신견내량에 있는 일본 수군을 넓은 바다인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공격하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3. 경과

견내량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8월 15일(음력 7월 8일),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 정찰선을 만나 추격했으나 견내량 해협에서 대규모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추격을 멈췄다. 이순신은 소규모 부대를 보내 일본 함대를 유인했고, 일본군은 이에 속아 한산도 앞바다로 따라 들어갔다.

3. 1. 학익진 전술과 화포 공격

와키자카의 일본 수군은 6척의 조선 함대를 추격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조선 함대는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넓은 해상에서 적을 포위하여 화력을 집중,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한 전술이었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조선 수군은 각종 화포를 이용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화력에 밀려 큰 피해를 입었다. 중위장 권준(權俊)은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였고,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으며 12척을 나포하였다.

일본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 속도가 빨라 함대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3. 2. 일본군의 패퇴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도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8]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일본군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도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8]

일본 함선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 속도가 빨라 함대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견내량과 무인도에서 머무르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8]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해전에서 부장인 와키자카 사헤에와 와타나베 시치에몬을 잃었고, 해적 출신의 마나베 사마노스케는 배를 잃었다. 또한, 와키자카 함대 중, 해전 중에 배를 버리고 한산도에 상륙한 자가 200명 생존했다. 와키자카는 그 후의 육상전인 제2차 진주성 공방전에 900명을 동원했고, 원래의 동원 인원 1,500명과, 배의 유지 부대를 남겨둘 필요를 생각하면, 사망자는 최대 300명 정도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8]

3. 3. 안골포 해전

구키 요시타카일본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일본어(加藤嘉明)가 이끄는 일본 수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단독 행동을 알고 7월 6일에 부산을 출발, 7일에 가덕도, 8일에 안골포에 정박하여 뒤를 쫓았다. 이순신은 안골포에 일본 함대가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악천후가 지난 후, 7월 10일에 정박 중인 일본 함대를 기습했다.

한산도 대첩 다음 날, 이순신은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 안골포는 얕은 여울 때문에 대형 선박 운용에 위험이 따랐으므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 함대는 유인에 넘어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 함대는 전진하여 닻을 내린 일본 함대를 몇 시간 동안 포격했고, 일본군은 내륙으로 후퇴했다. 나중에 일본군은 돌아와 소형 보트를 타고 도망쳤다.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모두 전투에서 살아남았다.[1] 조선 수군은 순차적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쏘는 작전으로 변경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공격을 반복했다. 공격을 받은 일본 함대는 밤 사이에 안골포를 떠나 귀환했고, 조선 수군도 다음날부터 근거지로 귀환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기록인 "견내량파왜장"에서 일본 함대의 발견 수를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으로 기록하고 있다.

4. 결과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켜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전투였다.[12] 이 승리로 조선군은 사기가 진작되었고,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로 승진하는 등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2]

4. 1. 제해권 장악과 수륙병진계획 좌절

조선 수군은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승리는 육지에서 잇따른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으며, 이미 상륙한 일본군에게도 위협을 가하여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12] 호머 헐버트는 이 해전을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칭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전투라고 평가했다.

당시 조선의 좌의정(부총리)이자 영의정(총리)이었던 류성룡은 자신의 저서 징비록에서 일본군이 수륙병진 작전을 계획했다고 기록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조선 국왕 선조에게 "일본 수군 10여 만이 서해에서 올 것이다"라는 서신을 보내 압박했는데, 류성룡은 이를 수륙병진책의 증거로 보았다.

그러나 고니시의 발언은 실제 일본 수군이 1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외교적 허세였을 가능성이 크다.[12] 명나라심유경 또한 고니시에게 "40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출동할 것이다"라고 했지만, 실제 파견된 병력은 4만 8천 명에 불과했다.

류성룡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군에게 실제로 수륙병진 계획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만약 있었다면, 일본 수군은 전라도 해역으로 바로 진출했거나, 1597년 칠천량 해전 승리 후 남원성 전투에 참전하는 대신 바로 전라도 서안으로 진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동해안에서도 일본군이 함경도로 침공했지만, 수군이 보급을 지원한 사실이나 계획은 없었다.[12]

4. 2. 조선군의 사기 진작과 전세 역전

이 해전을 진주대첩(1592년 10월 5일~10월 10일), 행주대첩(1593년 2월 12일)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부른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호머 헐버트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1]

4. 3. 이순신의 승진과 국제적인 인정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로 승진하였고,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2] 영국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이순신을 "타고난 지도자"로 칭송하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2]

5. 논란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 피해 규모에 대한 논란은 한국과 일본 사료의 기록 차이에서 비롯된다.

5. 1. 일본군 피해 규모에 대한 논쟁

한국과 일본의 사료에 따라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의 피해 규모에 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순신은 자신의 기록인 "견내량파왜장(見乃梁破倭狀)"에서 일본 함대 63척을 격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동원 정수가 1,500명임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8]

한국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군 병력을 5,000명~12,000명, 전사자 수를 5,000명~9,000명 등으로 과장하여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일본과 한국의 사료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다. 일본 측 사료인 『천정기(天正記)』와 "고려국(高麗国) 동 어인수장(島津家文書957호)"에 따르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병력은 1,500명이었다. 또한, 석고(石高)가 3만 석 정도의 다이묘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5,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9]

문록의 역에서의 동원 수[11]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이묘석고동원 병력
모리 데루모토112만 석30,000명
우키타 히데이에57만 4천 석10,000명
고바야카와 다카카게37만 석10,000명
가토 기요마사20만 석10,000명
고니시 유키나가20만 석7,000명
오토모 요시무네37만 석6,000명
구로다 나가마사12만 5천 석5,000명
다치바나 무네시게13만 2천 석2,500명
고바야카와 히데카네7만 5천 석1,500명
오타니 요시쓰구5만 석1,200명
구키 요시타카3만 5천 석1,5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3만 석1,500명



이 해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부장인 와키자카 사헤에(脇坂左兵衛)와 와타나베 시치에몬(渡辺七衛門)을 잃었고, 해적 출신의 마나베 사마노스케(真鍋左馬允)는 배를 잃었다. 와키자카 함대 중, 해전 중에 배를 버리고 한산도(閑山島)에 상륙한 200명은 생존했다. 와키자카는 그 후의 육상전인 제2차 진주성 공방전에 900명을 동원했고, 원래 동원 인원 1,500명과 배의 유지 부대를 고려하면, 사망자는 최대 300명 정도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6. 관련 작품

김한민 감독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한산도 대첩을 다루었다.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과 텔레비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74화에서 이 전투를 볼 수 있다.

6. 1. 영화

김한민 감독의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이 전투가 묘사되었다. 불멸의 이순신 74화에서도 한산도 대첩이 묘사되었다.

6. 2.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한산도 대첩 (Battle of Hansando) https://archives.war[...] 2024-05-25
[2] 서적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3] 웹사이트 한산도대첩 https://terms.naver.[...] Korean Studies Institute 2021-06-13
[4] 문서 『天正記』第七巻所収「ちやうせん国御進発の人数つもり」
[5] 문서 文禄4年正月15日付「高麗国動御人数帳」『島津家文書957号』
[6] 간행물 조선역에 있어서의 수군편성에 대해서 https://nagoya.repo.[...] 나고야대학문학부 1969-01
[7] 문서 玉浦から唐浦までの経緯は、『愛媛県史 近世上』([[愛媛県]]、1986年)P60-63より。
[8] 문서 ただし、亀船(亀甲船)の実在も史料上、確証はない。
[9] 문서 秀吉朱印状・慶長二年(1597)二月二十一日」陣立書
[10] 문서 参謀本部 関ヶ原役
[11] 서적 문록・경장의 역 吉川弘文館 2008
[12] 간행물 이순신과 문록・경장의 역의 해전에 관한 고찰 https://ipu.repo.nii[...] 환태평양대학 2022-03
[13] 웹사이트 "임진장초", 이순신, 충무공 http://www.choong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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